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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eries about Belgium.]
안녕하세요? 벨기에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인터프리터로 활동하고 있는 변서연입니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음악원과 앤트워프 왕립 음악원에서 석사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브뤼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글쓰기를 좋아해서 리뷰 또는 칼럼에 글을 기고하고 벨기에에서 열리는 각종 공식행사에서 한-영 통역가로도 활동중입니다.
분 야. 예술가
현소속. Antwerp Royal Conservatory
인스타그램. @rosedays_
Episode 17.
유럽, 그리고 벨기에의 모든 순간들에 대해서
오늘의 칼럼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동안 유럽, 그중에서도 벨기에를 중점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음식 명소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루었지요. 저도 글을 쓰기 전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또 제가 직접 겪은 경험과 배운 것들을 토대로 많은 것을 함께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벨기에라는 나라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으니까요.
어느덧 유럽과 인연이 되어 벨기에와 인연이 된 지 4년이 되었습니다. 유학이라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벨기에뿐만 아니라 유럽과 한국을 무대로 프리랜서로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 지금, 벨기에라는 나라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제가 거쳐온 여러 시간들을 공간의 특징에 빗대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음악과 공간이라는 다른 두 개체를 관련지어 연상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제가 퀵스텝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브랜드를 알게 되고, 브랜딩을 통해 다른 분야에서의 또 다른 전문성을 만들어내는 모든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그 시간을 거쳐 지금의 퀵스텝과 함께하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구텐 탁 도이칠란트
저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유학을 도전했다가 남들보다 많이 늦은 나이에 다시 유학을 가게 된 늦깎이 유학생입니다. 학사를 마치자마자 졸업장을 받고 바로 불가리아 소피아로 첫 유럽 유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언어라는 장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불가리아어는 저에게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결국 석사 준비 도중 한국으로 귀국했고, 이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한국에서 교육학 석사를 따고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교사가 되면 연주자는 거의 포기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험 준비와 연주를 병행하면서 고민하던 저는 다시 유학을 고민하게 되었고, 모두들 사회생활을 하며 정착할 나이에 결국 다시 한번 유학을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늦은 나이에 가는 만큼 신중하게 고민했고,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면서 난생처음 음악의 나라인 독일에 간 느낌은 기대와 달리 굉장히 낯설었습니다. 독일만의 분위기를 인테리어에 표현하자면 고딕 양식과 고전주의적인 느낌이 강한 나라라고 할까요. 음악의 본고장이라는 타이틀답게 그들만의 고전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저는 에센이라는 도시에 살았는데, NRW주라고 해서 수도인 베를린과는 또 다른 회색빛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다시 도전한 유학인 만큼 다시 악기를 잡고 저보다 어린 경쟁자들과 입시를 다시 보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무비자로 처음 독일을 건너가 실패라는 쓴맛을 보고 다시금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기약 없는 석사시험 합격을 위해 다시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도시인 에센의 전체적 느낌이 어두웠던 것처럼, 저는 그곳에서의 제 시간들 또한 회색빛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여름에는 늦게까지 밝고 화창한 날이 지속되고 겨울에는 춥고 일찍 해가 지는 여느 유럽의 나라들과 같은 날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저에게 회색빛이 강했습니다.
독일의 교수님께 레슨을 받으러 가면, 독일의 음악적인 색채를 강조하면서 그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이미 20년 넘게 바이올린을 배워오면서 가지고 있던 고유의 음악적인 색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뒤바꾸라는 말과도 같았습니다. 물론 배우러 간 유학이기 때문에 교수님의 말을 따르고자 많은 시도와 노력을 했지만, 본질과 틀을 중요시하는 전체적인 독일의 클래식은 저에게는 조금 버거운 느낌이 강했습니다.
음악적 어려움과 고민을 겪고 있던 당시에 코로나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제 유학에 대한 갈림길은 더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처음 터져 유럽으로 번진 코로나는 정말 증식하는 바이러스처럼 두려움을 동반해왔고, 제대로 결정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제로 한국으로 돌아가 있어야 했습니다. 정말로 영영 귀국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에서 좀 더 준비해서 다시 유학을 결정할 것인지 진퇴양난의 상황이 코앞에 닥쳐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 며칠 밤을 잠도 자지 못한 채 고민했고, 독일이 아닌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음악을 할 수 있는 나라에서 다시 도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미친듯이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벨기에와 저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목적지로 향하다.
유학의 처음 목적지는 독일이었기에, 벨기에는 저에게 정말 낯설고도 무지한 나라였습니다. 한국에서 한창 코로나로 인해 유럽의 하늘길이 막힌 상태에서 매일 고민의 연속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눈을 돌린 나라는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이었습니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한 음악대학이 유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직업 외에도 한-영 통역가로도 일하고 있을 만큼 영어는 저에게 자신 있고 좋아하는 분야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또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곳을 가게 된다면 음악에만 더 몰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다시 준비하기엔 완전히 다른 대륙이라 비자가 매우 달랐고, 네덜란드는 거의 대부분의 도시가 집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특히 암스테르담은 기본적으로 일 년을 매달려도 학생이 집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상태였기 때문에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했던 벨기에라는 곳을 선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제가 벨기에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우스꽝스럽게도 관광에 관해서였습니다. “벨기에는 와플로 유명하고 감자튀김이 맛있고 오줌싸개 소년이 있어” 음악에 관해서는 세계 3대 콩쿠르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열린다는 사실 외에는 무지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콩쿠르가 있기에 음악학교와 교수진의 수준 또한 세계적일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스페인에 가보지 않았지만 가우디의 유산인 가우디 양식이 이미 훌륭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우리는 실제적으로 적용하기 이전에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곧 이것을 적용하면서 집중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인테리어도 이러한 이치와 같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뛰어난 브랜드의 이미지를 보면서 영감을 받고 이를 선택하게 되고, 곧 이것은 나의 보금자리와 삶에 적용되어 또 한 번의 좋은 결과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곧 저는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한 콘서바토리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 학교에서 가장 와닿는 교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저는 브뤼셀 왕립음악원(Brussels Royal Conservatory)을 목표로 다시 한번 시험을 준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코로나는 쉽게 끝나지 않았기에 유럽 대부분의 학교가 비디오 제출로 입학시험 방식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황 연주에 강했던 저는 또 한 번의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원테이크로 모든 곡을 녹화해서 제출해야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영상이라는 특성상 다시 시작하게 되곤 했습니다. 한국에서 영상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저는 연습실에서 새벽까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이때를 되돌아보면 사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만큼 정말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비디오를 제출하고 교수님들과 Zoom으로 인터뷰까지 마친 뒤에 저는 마침내 합격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배우고 싶어하던 지금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계신 Philippe Graffin 교수님의 제자로 석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낯설지만 반가워 안녕 벨기에
그렇게 코로나가 잠잠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저는 더 미룰 수 없는 왕립음악원 석사과정을 위해 벨기에로 가는 비행티켓을 끊게 됩니다. 코로나가 정말로 세계를 잠식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럽에 가는 길은 험난하고 너무나도 까다로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답답한 마스크를 끼고 사람조차 몇 없는 밤 비행기 안에서 낯설고도 두려움 감정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긴 기다림 끝의 시작이라는 설레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코로나도 정해진 길 앞에서는 저에게 단순한 애물단지 정도였나 봅니다.
그렇게 도착한 벨기에에서 처음 마주친 풍경을 아직도 사진처럼 잊지 못하곤 합니다. 브뤼셀 공항에서 한참을 돌아서 도착한 시티 센터의 Beurs 역을 나와서 쳐다본 The Beurs 건물 위로 펼쳐진 수채화 같은 하늘은 진정한 유럽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풍경이었습니다.
기승을 부리던 유럽의 무더위가 한층 꺾인 늦여름이었습니다. 세지 않았지만 기분 좋을 만큼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구름의 색은 정말로 진한 하얀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거의 부모님과 함께 살았기에 거의 첫 자취이자 유럽에서의 혼자 살기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브뤼셀 또한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에 제가 구한 스튜디오 또한 학생 아파트먼트의 1층에 위치한 작은 스튜디오였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은 제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공간의 소중함에 대한 생각과 인테리어라는 것이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주는지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쉽지 않은 유학생활에서 그 작은 스튜디오는 제게 쉼과 에너지를 주곤 했습니다. 20m²가 채 되지 않는 싱글 침대와 옷장 그리고 책상이 다인 공간에서 저는 제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furnished studio였기에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긴 오케스트라 연습으로 인해 지친 날에는 좋아하는 화이트 와인을 사다가 영화를 보며 천천히 마시곤 했습니다. 병을 비우고 나면 학교 앞 꽃집에서 그 계절에 가장 화사한 꽃을 사다가 와인병에 꽂아놓곤 했습니다. 가끔씩 가던 인테리어 숍에서 산 린넨을 가져다가 책상 한쪽에 깔아 놓기도 했고, 벽에 좋아하는 엽서를 잔뜩 붙여놓거나 샤워부스에 유칼립투스를 꽂아 두기도 했습니다.
공간이 주는 효과는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유럽에서의 대비되는 계절, 특히 겨울에 많이 우울해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미친듯한 연주 스케줄 때문에 한국을 가지 못하는 어두운 겨울이 오면 저는 집 안을 밝히고 그 공간에서 제 자신을 다독이곤 했습니다. 큰돈을 들이고 명품 가구들로 가득 채운 좋은 인테리어가 아니었지만, 제 나름의 인테리어는 제 삶을 지지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유럽에서의 시간들을 즐기고 견뎌내며 마침내 석사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에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은 음악을 제대로 배우기엔 저에게 너무 짧았고, 저는 최고연주자 과정을 연이어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보금자리가 된 나의 벨기에
브뤼셀에서 계속 살고 있었지만 최고연주자 과정은 다른 교수님께 다양한 것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벨기에 내에서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보게 되었고, 또 다른 명문 음악원인 앤트워프 왕립음악원(Antwerp Royal Conservatory)에 도전하는 또 한 번의 입시생이 되었습니다.
이미 졸업 리사이틀까지 총 두 번의 음악회를 거친 저는 다시 도전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더 자신감이 생긴 상태였습니다. 석사 시험 때 긴장해 음정 박자만을 생각하던 때에서 벗어나 이제는 음악을 어떻게 연주하면 좋을지 더 걱정하고 있는 조금 더 프로페셔널 연주자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저는 석사 시험 때의 긴 부재 없이 한 번에 시험에 합격해서 최고연주자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이 최고연주자 학위 때는 챌린지이자 아낌없는 무대의 순간들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찬란한 때가 있듯이 저에게도 이 학위를 졸업하는 때까지가 정말로 찬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레퍼토리를 레슨받으며 스스로의 음악을 만들어 나갔고, 교수님과 함께 연주회를 하기도 하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앙상블을 구성해가며 연주자로서 다양한 색채를 가꾸어 나갔습니다.
인테리어의 구성을 보면 그 디자인을 완성한 디자이너의 분위기나 색채가 보이곤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테리어가 아닌 그 디자이너가 살아온 인생과 완성한 결과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문성을 보고 감탄하며 그 완성품을 적용함에 따라 그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셈입니다.
이와 같이 최고연주자 과정에서의 제 전문성은 다양한 연주를 통해 사람들의 격려와 박수를 받고,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제 음악이 저만의 색채가 담겼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감동을 주는 데 있었습니다. 이 도전의 끝인 졸업 리사이틀에서 저는 부모님과 지인들, 교수님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학의 끝인 최고연주자 졸업 후 학위증을 받을 때는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지난 6년여간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했던 순간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생에서 큰 선택을 잘한 기분이었습니다. 항상 끝에서 오는 아쉬움은 존재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던 순간들이라 오히려 기쁨과 보람이 더 컸습니다.
목적지가 아니었던 벨기에였고, 살면서 내가 벨기에라는 곳에서 음악으로 박사 과정까지 마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결국에 저에게는 또 하나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브뤼셀이라는 도시는 저에게 두 번째 집인 고향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여정과 보금자리>
저에게 처음 발을 디뎠던 독일이라는 시작점에서 벨기에라는 지점으로 도달했듯이,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유학생활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처음 나에게 맞는 취향에 따라서 브랜드를 선택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이미지의 브랜드에서 호감을 얻게 되고, 그것을 적용함으로써 더없는 만족감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퀵스텝 또한 당신의 보금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곧 당신이 경험한다면 최상의 만족감을 얻으리라는 자신감을 의미합니다.
제 유학에 대한 여정의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끝 지점에서 또 다른 성공이라는 결과를 얻어냄과 같이 퀵스텝을 통해 당신의 보금자리, 당신이 살아가는 장소에 안락함이라는 결과를 얻어낼 것입니다.
에디터 : 신명마루 편집부
사진 출처 : QUICK-STEP, (주)신명마루, Unilin (유니린)